무라카미 하루키의 슬픈 외국어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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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외국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문학 사상사/ 1994 Then Sad Foreign Language
Public Library 도서관에서 빌림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작품들을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그의 작가로서의 창조적인 삶을 소재로 쓴
기행문 '먼 북소리' 등을 좋아하였기에 '슬픈 외국어'도 좋은 책이었습니다.
page 175 '사내아이'의 동심을 언제가지나 간직하고 싶다- 운동화 신고 매달 한 번은 이발소 가며, 일일이 변명하지 않는
'사내아이' 이미지, 그걸 버리고 싶지 않다.
이제 나는 도저히' 사내아이'라고는 불릴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사내아이' 라는 말에는 아직껏 이상하게도 마음이
끌린다. 그 말의 울림이나 거기에 담긴 느낌 같은 것이 참 좋다....생략...당신에게 있어서 '사내아이'의 이미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겁니까? 라는 의미의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간단 명료하게 대답할 것이다. 조목조목 쓰자면 다음과 같다.
. 운동화를 신고 다니고
.한 달에 한번 (미장원이 아니라 ) 이발소에 가며
. 일일이 변명하지 앟는다.
(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세번째 '일일이 변명하지 않는다'라는 항이었음)
..생략..
그러나 일일이 변명하지 않는다는 항목을 실행해 나기란 정말 어렵다. 생활을 해나가면서 딱히 변명할 작정은 아니었어도
무심결에 , '아니, 사실은요..."하고 마치 변명하는 투로 말하고 있는 자신을 퍼뜩 깨닫고 씁쓸해 했던 적이 종종 있다.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젊은 시절은 제쳐놓고, 어른이 되어 깊고 폭 넓게 사회와 관계를 맺고 어느 사이엔가 복잡한
인간 관계 속에 말려들게 되면, 변명과 해명을 하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들다. 그런 단계에서 해야만 할 해명을 하지 않으면 현실적인
손해를 입을 뿐만 아니라, 오해 끝에 깊은 상처를 받게도 된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게 되거나 본의 아니게 소중한 친구를
잃게 되는 경우도 있다.
평범한 세계에서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내가 속해 있는 문학 관계 사회는 얘기가 한충 더 복잡해진다. 이곳에서는 여러 의견이 속속
활자화되어 광범위하게 배포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에 대한 변명. 해명도 결과적으로 광범위해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단 그 변명 사이클에 들어가고 나면, 그야말로 하나에서 열까지 일일이 변명을 해야만 된다. 어디까지가 정말로 필요한 해명이고,
어디까지가 정말로 필요치 않은 변명인가, 하는 경계선을 점점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가가 됐을 때부터 글을 이용해서 개인적인 변명을 하는 일만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그리 강인한
사람이 못 되니까, 일상 생활 속에서는 무심코 변명 따위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글을 이용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
약간 과장된 변명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설령 전 세계적으로 오해를 받는다고 해도, 그건 그것일 뿐 어쩔 도리가 없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소설가라는 건 좋든 싫든 그렇게 모두에게 쉽게 이해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라는
뜻이다. " 아는게 힘이다" 라는 말도 있지만, 소설가에게는 오히려 "오해는 힘이다" 라는 쪽이 옳지 않을까?
소설의 세계에서는 이해에 이해를 거듭해서 얻어진 이해보다는 , 오해에 오해를 거듭해서 얻어진 이해쪽이, 때때로 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 page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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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역사를 함께 배우는 세계 명작 지도/ 최의영 지음/ 임지용 그림/ 살림 출판/2007 년도
도서관에서 빌림( 한국 도서 재단에서 기증한 도서입니다: www.klfhawaii.org)
청소년을 위한 책이지만 중년인 저도 좋았습니다. 주로 영미문학에만 치중되어 있는 독서 습관때문에
이 책에서 알려주는 세계 명작들 중 아직 접하지 못한것들이 많았어요.
사진도 실려있고 폰트 (font) 도 이쁘고 읽기 쉽고 유익하고, very go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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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교리 성대중이 쓴 궁궐 밖의 역사/ 성대중 지음/ 박소동 엮음/ 열린터/ 2007년도
도서관에서 빌림
(조선시대 신윤복, 김홍도 화백의 그림들이 삽화로 있어서 이뻐요.)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여서일까? 가끔은 문장이 이해하는데 너무 복잡하게 쓰여졌다고 생각들었으나
이야기 자체는 의미있고 흥미롭습니다.
특히 카르마를 조심하여야 한다는 부드러운 선비의 마음이 깃든 이야기인지라 그점이 가장 맘에 들었어요.
( 페이지 232 ) " 나는 억울하다. 김자점이 사형 될 때 백관들이 참석했다. 김자점이 함릉군 이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은 반드시 나의 억울함을 알 것이다."
함릉군은 기개가 높은 사람이었지만 두려워하며 목을 움츠렸다.
김자점의 손녀가 제천역으로 귀양 가서 노비가 되어 처녀로 일생을 마쳤다. 그녀는 중국인에게 상술을 배워
사대부 집안을 드나들었는데, 점괘를 말하면 신기하게도 대부분 적중했다. 그녀는 간혹 자기 집안의
억울한 일을 말할 때면 번번이 분해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대체로 김자점의 역모는 중국과 내통한 데서
말미암았고, 이형장이 길잡이가 되었다. 그러나 이형장의 옥사 역시 드러난 증거가 적기 때문에 김자점이
감히 스스로 원통하다고 한 것이다.
민회빈 소현세자빈이 화를 당할 때 승평군 김류가 수상으로 있으면서 피하고 담당하지 않았는데,
김자점이 앞장서서 그 일을 담당하여 죄를 덮어씌우고 옥사를 일으켰다. 민회빈의 어머니는 나이가
80 여 세였는데 김자점이 가혹하게 심문하여 자백을 받아 낸 다음 저잣거리에서 죽였고
강씨 일족은 멸족되었다. 하늘의 도는 돌려주기를 잘하니, 김자점이 감히 스스로 억울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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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정원/ 우치우위/ 유소영. 심규호 옮김/ 미래 M & B/ 2003
도서관에서 빌림 (Posco 기증, Moon's Book Club )
( 나의 평: 구입하여 서재에 두고 싶은 책들 중 하나. ) 중국의 문화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쓴 책인데 이해하기 쉽고
마음을 움직이는 문체라고 봅니다. 이책에서 말하는 지명을 따라 중국을 유람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소동파 , 왕양명, 산시 상인들,악록서원,왕안석 등등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어요. 허나 발해에 관한 이야기등은 ? 아직도
우리가 탐구하고 알아내야 할 것들은 많은거 같습니다.
페이지 247
얼마전 빙신의 <나의 집은 어디에> 라는 짧은 산문을 읽은 적이 있다. 94세의 고령인 빙신 역시 처음에는 원행을 떠나는
자의 이미지를 통해 수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는 세계를 떠돌며 여러 나라, 여러 도시에서 살다가
마지막에 베이징에 정착했다. 그야말로 '어느 곳이 타향인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전혀 세속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자꾸만 고향에 돌아가는 꿈을 꾼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돌아가겠다는 고향은
어디에 있는가? 일반적으로 여성은 가정주부가 되어 완전한 가정 의식을 가지게 된 연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집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빙신의 고향은 그녀가 성년이 되어 결혼한 이후의 집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고향 꿈을 꿀 때마다 나나타는 것은 언제나 소녀 시절의 집이었다고 한다. 장장 한 세기를 돌아 결국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백발의 노인은 천진스러운 소녀와 하나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노인이 꾼 귀향의 꿈은 일생 동안
유랑을 했던 그 길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만약 그가 초년에 살던 그 집을 떠난 적이
없었다면 이제 그가 꾸는 귀향의 꿈도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볼 때 집은 일종의 생활이며,
깊은 의미에서 볼 때 집이란 일종의 그리움이다. 먼 길을 떠난 자만이 집을 간절히 그리워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
떠난 자만이 진정한 의미의 집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생략....
이백 ,최호, 빙신, 아이우, 모두 글 재주가 있는 이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시문을 통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만 사실
강렬한 유랑의 느낌이나 고향에 대한 생각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그저 작은 심장 가득 음미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이 심장이 박동을 멈추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 파도 사이에 모습을 감출 수도 있고, 수풀 속에 묻혀 버릴 수도 있으며,
이국 타향 낡은 건물 창문 사이에 굳어 버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면 이는 말 없는 서사시와 마찬가지이다.
중국 역사상 거대한 사회변동이 일어날 때 마다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옮기고 원행을 떠났다. 어떤 이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툴툴 털고 일어나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원행을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결국 모두 무언의 서사시가
되어 목이 메여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만다. 요즘 백발의 화교들이 아무리 외지고 먼 곳일지라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눈물을 삼키는 슬픈 모습을 중국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은 총총히 왔다가 그렇게 다시 총총히 떠나간다.
이렇게 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귀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에 대해 어떤 이유를 말하지도 않으며,
자신을 향해 물음을 던지지도 않는다. 그저 눈물을 닦고 나서는 다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저기 먼 곳으로 사라져갈 뿐이다. "
페이지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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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잡설 /남회근 지음/ 신원봉 옮김/문예출판사/1998
도서관에서 빌림 ( Moon's Book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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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자 교과서 / 정민 박수밀 박동욱 강민경 지음/Humanist/ 2004
도서관에서 빌림
유익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열거한 방법에서 흠( ? )
/배추와 부추, 그리고 상추/
" 채소 중에는 '추'자로 끝나는 것이 셋있다. 배추와 부추, 그리고 상추가 그것이다. 이 '추'는 모두 '채 (菜 ) 가 변한 것이다.
김치는 배추로 담근다. 배추는 한자로 백채 (白菜) 또는 숭채 라고 한다. 혹은 생긴 모양이 소 밥통 같다고 해서
우두채 라고도 불렀다. 백채를 중국음으로 읽으면 '바이차이'이다. 바이차이를 빨리 읽으면 '배채'가 된다.
배채는 중세 문헌에 나오는 표기이다. 배춧잎은 밑둥이 희기 때문에 '흰 채소' 란 뚯으로 백채라는 이름을 얻었다.
배추는 잎이 푸르기에 중국에서는 청백채 (靑白菜) 로 부르기도 한다.
부추는 전라도에서는 '솔' 이라고 하고, 경상도에서는
'정구지'라고 부른다. 옛 문헌에서는 부추의 음을 반영해서 후채 (厚菜) 로 적었다. 한자로는 구채 (컴퓨터로는 이 한자' 구' 를 표기하는 기능이 없군요)
또는 해채 로 적는다. 또 상추는 한자로는 와거 ( ) 또는 생채라고 하였고, 우리말로는 '부루'라고도 하였다.
날 것으로 먹기 때문에 생채 (生菜) 라고 한 것이 음운 변화를 거쳐 '상추' 또는 '상치' 가 되었다.
백채 (白菜) 가 배추로, 후채 (厚菜)가 부추로, 생채 (生菜) 가 상추로 각각 바뀌었다. 음운적으로는 좀더 살펴야 할 것이 있으나,
순 우리말로 알던 어휘도 이렇게 한자말에서 나온 것이 적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