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mission : 1 年에 최소 100권의 책을 읽을 때까지 ...
(57)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사이먼 싱 지음
박병철 옮김
영림카디널 출판
"수학자들은 화가나 시인들처럼 아름다운 심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수학적 아이디어는 색채나 시어처럼 서로 조화롭게 어울려야 한다.
수학에서 아름다움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보기 흉한 수학이 설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G.H.하디.
페이지 226
요즘 읽은 책들 중,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 준 책.
원래 수학은 그렇게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평화로와서 아름다움이 느껴지며 뇌에 즐거움을 주는,
학문으로
그동안 읽었던 책 내용들 때문일까? 어딘지 맥빠지는 느낌에 빠져있었기에
(아님 계절탓인지도...여기는 가을이 느껴져야 하는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더워 기운빠지네요)
joy 를 찾고 싶은 마음으로 지난 주 도서관에 갔을 때, 수학에 관한 이 책을 골랐음
사이먼 싱, 그는 유쾌하고 재밌는 책을 썼다.
우선 그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한 와일즈에게만 focus 하지 않고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디오판토스에 이어 피타고라스의 그 유명한 직각삼각형의 변에 대한
정리를 조금 비틀어 새로운 정리를 내놓고
그 정리에 대하여 자신은 증명를 했는데 니들도 한번 해보라던 아마츄어 수학자였지만
그 어느 누구보다 더 수학자다왔던 페르마와
와일즈의 증명에 필요했던 문제들을 다룬 여러 수학자들의
이야기도 들려주고 있다.
물론 와일즈의 길고 또 복잡한 증명을 세세하게 step by step 깊이있게 파고들어 이해를 하게 해주진 않았다.
아마도 독자들이 거기까지 원하진 않았을거라고 그는 생각했겠고 그의 판단은 맞을것이다.
스텝마다 하나하나 샅샅히 파고 들고 싶은 독자들은 와일즈의 증명 자체를 읽고 계산해보는 수학자들일터이니...
다음은 제가 메모 스티커를 붙여둔 페이지입니다
( 페이지 28- 29)
피타고라스는 당시 그리스의 영토였던 남부 이탈리아 지방에
그곳 최고의 부자였으며 엄청난 괴력을 가진 Milo 라는 사람의 후원을 받아
피타고라스 학회 Pythagorean Brotherhood 를 설립하였고
회원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전 재산을 헌납하고 탈퇴시에는 처음 헌납한 재산의 두배를 받아나가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남녀평등이라 여자들도 회원이 될 수 있었다
학회 설립 후 철학자 Philosopher 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학교의 교육 이념으로 삼았다.
" 어느해엔가 고대 올림픽을 관전하고 있을 때 프리우스의 왕자 레온이 피타고라스에게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 는 질문을 던졌다. 피타고라스는 <나는 철학자입니다> 라고 간단 명료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레온 왕자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피타고라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레온 왕자여, 인생이란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운동경기와 비슷합니다.
이렇게 많은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떤 이는 재물을 구하는 일에 몰두하고,
또 어떤 이는 명예와 영광을 얻으려는 야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서 이해하려고 얘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어떤 이는 제물을 탐하고
또 어떤 이는 권력과 권세를 향한 맹목적 정열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가장 현명한 이는 삶 자체의 의미와 목적을 탐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연의 숨겨진 비밀을 찾아헤메고 있습니다.
완전무결한 현자란 있을 수 없겠지만 이들이 바로 '철학자' 입니다.
그들은 지혜를 사랑하고, 자연의 비밀을 탐구하는 열정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후 피타고라스 학회의 마지막은 어떠 했는지 피타고라스의 최후는 어떠했는지 이 책은 이야기 해주고 있어요. )
유클리드의 기하학에 이어 정수론에 대하여 유명한 저서를 남긴 알렉산드리아의 디오판토스 Diophantus 에 대한.
디오판토스는 페르마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책 <아리스메티카>의 저자
(페이지 79)
" 문제의 해결사 답게 디오판토스의 묘비에는 그의 인생 역정을 수수께끼로 묘사한 글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 신의 축복으로 태어난 그는 인생의 1/6 을 소년으로 보냈다.
그리고 다시 인생의 1/12이 지난 뒤에는 얼굴에 수염이 자라기 시작했다.
다시 1/7이 지난 뒤 그는 아름다운 여인을 맞이하여 화촉을 밝혔으며
결혼한 지 5년 만에 귀한 아들을 얻었다.
아! 그러나 그의 가엾은 아들은 아버지의 반밖에 살지 못했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깊은 슬픔에 빠진 그는
그 뒤 4년 간 정수론에 몰입하여 스스로를 달래다가 일생을 마쳤다.>
이 묘비에 새져진 글로 부터 디오판토스의 수명을 게산 할 수 있을까? "
( 해답은 책의 뒷부분 부록에)
( 페이지 79-81)
페르마의 대부분의 연구가 비롯된 그의 성전이었던 디오판토스의 <아리스메티카>라는,
1621년에 출판된 이 책의 일부가
어찌 종교인들의 공격에서 살아남아 르네상스 시대의 수학자들과 페르마에게 전해질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 유크리드 시대에서 디오판토스 시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알렉산드리아는 전세계 지성의 중심지로
명성을 날리면서 한편으로는 외부의 침략 세력때문에 곤혹을 치러야 했다.
B.C.47년 Julius Caesar 가 클레오파트라를 몰아내기 위해 알렉산드리아 공격. 도서관에 불이나 수십만권의 책이 불에 타고 유실.
-> 전쟁이 끝난 후 클레오파트라는 도서관 재건을 명.
-> Caesar 사망
-> 클레오파르라의 환심을 사기위해 안토니우스는 페르가몬 시로 진격, 책들을 알렉산드리아로 가져옴.
-> 도서관은 서기 389년까지 '세계 최대'라는 명성을 누림
-> 로마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에게 이교도들의 사원을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도서관은 세라피스 사원 내부에 있었기에 파괴 되었고 그 와중에, 600년 동안 모은 책들을 지키려고 애 쓰던 학자들 또한
기독교인들에게 무참히 살해 됨
-> 복사본의 형태로 살아남은 중요책들로 인하여 지식인들은 계속 알렉산드리아로 모임
->서기 642년, 회교도들 침략. 도서관 파괴.
-> 침략에 성공한 회교도들의 주권자 칼리프 Omar 는 '코란에 위배되는 책은 우리의 적이므로 모두 폐기처분한다.
코란에 위배되지 않는 책들 역시 읽을 필요가 없으므로 폐기처분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코란 뿐' 그의 명령에 따라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의 모든 책들은 불태워졌고
그리스의 수학자들은 화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이때 디오판토스의 책들도 함께 소실되었고 <아리스메티카> 열세권 중
여섯권이 살아남았다.
이후 수학이란 학문의 명맥은 인도와 아랍의 소수의 수학자들에 의해 이어져
기존의 수학체계에 이들은 '0' 이라는 요소를 추가했고 '0'을 '무한대'라는 개념과 연결시켰고
그리스식 기호와 사용이 불편한 로마식숫자 표기법을 과감하게 버렸고 '아라비아 숫자'라는 새로운 숫자를 고안하여
사용하였다고...
(페이지 189) 괴텔의 첫번째 정리에 관한 설명 중에서 :
"크레다 섬에 살고 있는 에피메니데스는 어느 날 다음과 같이 간단 명료한 주장을 했다.
<나는 거짓말쟁이이다.>
이 문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하려고 할 때 , 당장 역설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먼저 이 문장이 참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에피메니데스는 거짓말쟁이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주장이 참이라고 가정했으므로 에피네니데스는 분명 사실을 말한 것이다.
<이 문장에는 아무런 증명도 들어 있지 않다.>
만일 이 문장이 거짓이라면, 이 문중은 증명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장의 내용과 상반되므로 모순이다.
따라서 모순을 낳지 않으려면 이 문장은 참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참이라고 해도 이 문장은 증명 될 수 없다. 문장 자체의 내용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괴텔은 위 문장을 수학적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즉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수학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페이지 192-193)
"괴텔의 업적에 코헨의 발견이 더해지자 ( 폴 코헨 Paul Cohen은 특정한 질문이 결정 불가능한지의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 사투를 벌이고 있던 전세계의 수학자들과 아마추어
수학자들 사이에 끔찍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페르마의 정리 역시 결정 불가능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일 페르마의 정리가 결정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곧 페르마의 정리가 참이라는 것을 뜻한다.
...피에를 드 페르마가 디오판토스의 저서 <아리스메티가>의 여백에 별 생각없이 써놓은 주석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어려운, 역사상 최고의 난제가 되었다. 300년 동안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고,
괴텔은 그들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 증명을 찾느라 헛수고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부 수학자들은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비지땀을 흘르고 있었다. "
(페이지 197)
" 3인 결투는 결투 인원이 세 명이라는 것만 빼고는 2인 결투와 동일한 문제다.
어느 날 아침, 미스터 블랙과 미스터 그레이 , 그리고 미스터 화이트 세사람은
극렬한 논쟁을 벌이던 끝에 한 사람의 생존자가 남을 때까지 권총으로 결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미스터 블랙의 권총 솜씨는 세사람 중 가장 서툴러서 명중률이 1/3 밖에 되지 않는다.
미스터 그레이는 이보다 조금 능숙하여 평균 2/3 의 명중률을 보이고 있다.
미스터 화이트는 직업 총잡이로서 백발백중의 명중률을 자랑한다.
결투를 공정하게 치르기 위해 이들은 명중률이 낮은 사람부터 한 발씩 차례로 권총을 발사하기로 합의 보았다.
즉 미스터 블랙이 제일 먼저 한 발 쏜 뒤 미스터 그레이 (살아있다면) 그리고 미스터 화이트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의 순으로 권총을 발사하기로 한 것이다. 단 한 사람의 생존자가 남을 때까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미스터 블랙은 첫 발을 어디에 겨누어야 할 것인가?>" ( 답은 책의 부록에 있음)
1944년 노이만의 책 (( 게임과 경제의 운영에 관한 이론)) 에서 게임이론 game theory 라는 용어를 처음 도입했고
이후 냉전체제 아래 첩보전에 유용하게 적용되리라는 것을 RAND 회사는 예견하고 노이만을 고용하였다..
( 수학자들은 전쟁시 암호해독 때문에 고용되었다)
정부에 속해있던 암호연구소로부터 강제로 징발당한 Alan Turing 이 이 책에서 소개 되는 부분이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자동연산장치 ACE 를 만들었고 프로그램이 가능한 세게최초의 컴퓨터를 만들었다
(페이지 207)
" 튜링은 계산기 하나를 유산으로 남겼는데, 그것은 사람의 머리로는 평생이 걸려도 모자랄 계산을 몇시간
만에 해낼 수 있느 원시적인 컴퓨터였다. 오늘날의 컴퓨터는 페르마가 평생동안 했던 계산을 단 몇 초
만에 끝낼 수 있을 정도로 진보하였다."
( 페이지 208 )
" 일반인은 눈부시게 진보한 현대 과학 덕분에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거의 증명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수학자들은 컴퓨터를 이용한 증명이 단지 피상적인 이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수퍼 컴퓨터를 동원한다 해도 무한히 많은 모든 정수 n 에 대하여 <페르마의 정리> 옳은지를
일일이 계산 할 수 는 없으므로 계산 도구를 사용하여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하는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컴퓨터가 제아무리 계산을 열심히 한다 해도 '모든 정수' n 에 대하여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하는것은
컴퓨터 능력의 한계를 훨씬 벗어나는 일이었다.
David Lodge 는 그의 저서 <영화 팬 The Picturegoers> 에서 무한대와 비슷한 개념인 '영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서술하였다 : 지구만한 크기의 쇠로 만든 공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 쇠공 위에는 100만 년 마다 한 번씩 파리가 날아와 잠시 앉았다가 다시 날아간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어 쇠공이 모두 닳아없어질 만큼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그것은 영원의 시간에 비하면 한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영원의 시간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와일즈는 그의 증명에서 귀류법을 사용하였고 그를 설명하기 위해
귀류법이라는 찹터에서 사이먼 싱은 두 일본인 수학자 유타카 타니야마와 그의 동료 고로 시무라가 소개하고 있다.
(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credit 이나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한게 안타깝게 생각되었고 특히
주위로부터 인정은 커녕 믿음 조차 얻지 못한 상황에서 젊은 나이에 자살을 선택한 유타카 타니야마가 아깝다고 생각)
"
모듈 형태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또 대칭성만이 유일한 관심사이기 때문에 19세기가 되어서야
수학자에게 발견되었지만
타원 방정식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들도 익히 알고 있었으며 대칭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모듈 형태와 타원 방정식은 둘 다 수학임에 틀림없지만 분야가 너무도 판이하게 달라서
둘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타니야마와 시무라는 타원 방정식과 모듈 형태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발표하여 수학계를 경악케 했다."
페이지 217
"타니야마는 몇 개의 모듈 형태를 추가로 계산해 보았다.
역시 각각의 M-급수는 특정한 타원 방정식의 E-급수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이쯤 되자 그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 모든 종류의 모듈 형태는
자신의 M - 급수와 동일한 E- 급수를 갖는 타원 방정식을 마치 파트너처럼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모든 모듈 형태는 동일한 DNA를 갖는 타원 방정식과
1:1 로 대응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 나아가, 모든 모듈 형태의 근본은 교묘하게 위장된 타원 방정식
그 자체 일지도 모른다. "
페이지 239
타니야마의 자살 후 남겨진 시무라는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시무라가 수집한 증거들이 쌓이자 이 이론은 널리 수용되기 시작.
앙드레 베일이 <타니야마 시무라의 추론>을 받아들여 서방 세계에 소개하였고 추론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발견하였다.
(이후 이 추론은 <베일의 추론>으로까지 불려지는등 추론의 이름
이 복잡해졌지만 - 아! 타니야마 불쌍! -
이 책에서, 저자 사이먼 싱은 <타니야마 시무라의 추론> 이라고 부르겠다는 현명함을 보여주고 있다.)
페이지 251
" 게르하르트 프레이 Gerhard Frey 는 문제의 추론을 증명할 만한 아이디어를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귀가 번쩍 뜨이는 놀랄 만한 주장을 펼쳤다.
타니야마-미수라의 추론이 증명되기만 하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도 덩달아 증명된다는 것이었다.
프레이의 차례가 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 위에 페르마의 방정식을 적어 내려갔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가 주장하는 바는 이 방정식을 만족하는 정수해 (x,y,z) 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레이는 접근 방식을 조금 바꾸어 <페르마의 정리> 가 사실이 아닌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생각했던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위의 방정식을 만족하는 정수해는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하게 된다. ( 그리고 그는 몇단계의 방적식을 풀어나가고
그리고 얻어진 방정식이 바로 전형적인 타원 방정식이라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페르마의 방정식을 타원 방정식의 형태로 변환시킴으로써, 프레이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
<타니야마-시무라의 추론>을 연관시킨 것이다. 그리고 프레이는 페르마의 방정식으로부터
유도된 타원 방정식이 정상에서 벗어난 기형적인 방정식임을 지적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타원 방정식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타니야마-시무라의 추론>은 틀린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프레이의 방정식은 유령 방정식과도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가 틀렸다는 가정하에서 유도된 방정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프레이의 방정식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에 대응하는 모듈 형태를 찾을 수 있어야 하는데,
방정식의 형태가 너무도 기이하여 모듈 세계의 파트너를 찾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그런데 <타니야마 -시무라의 추론>에 따르면 모든 타원 방정식은 모듈 형태와 반드시 연관지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프레이의 타원 방정식이 존재하려면 <타니야마 -시무라의 추론>은 틀린 것이어야만 했다.
1. 만일 <타니야마-시무라의 추론>이 사실로 판명된다면 모든 타원 방정식은 모듈적 성질을 가져야한다.
2. 만일 모든 타원 방정식이 모듈적 성질을 가저야 한다면 프레이의 타원 방정식은 존재할 수 없다.
3. 만일 프레이의 타원 방정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페르마의 방정식에 정수해란 있을 수 없다.
4. 따라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맞는 것이다.
"청중들은 프레이의 천재적인 발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나 잠시 후
그의 논리에 근본적인 허점이 있음을 간파하고 또 한번의 충격을 받았다...프레이가 범한 오류는 그다지
심각한 문제는 아닌 거 같았지만 어쨌거나 이것을 수정하지 않은 한 그의 주장은
완전한 논리가 될 수 없었다. ..누군가 프레이의 오류를 바로 잡는 사람이 페르마와
타니야마-시무라 사이의 다리를 완성시킨 공신이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페이지 254
"수많은 역사와 애환을 낳았던 수수께끼는 드디어 20세기의 수학혁명을 가져온 하나의 추론과
세기적 결합을 이루었다. 이제 수학자들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귀류법'이라는 증명법을 채택하게 되었다. 즉,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참이라는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단 그것이 거짓이라고 가정을 한 뒤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페르마의 정리>가 거짓이면 <타미야마-시무라의 추론>도 틀린 추론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일단 , <타니야마-시무라의 추론>이 참으로 증명된다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는 반론의 여지없이 완벽하게 증명될 것이다."
페이지 259
( 이 책에는 여러 수학자들이 소개되어 있는 데 그중 페이지 269부터 소개된 에바리스트 갈루아
는 가장 흥미로운 천재였다.)
(와일즈는 은둔 생황를 하며 집중하며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 데 몰두하는데..)
" 와일즈가 해야 할 일은 무한히 많은 수의 타원 방정식이 무한히 많은 수의 모듈 형태와 1 대 1로
대음관계를 이룬다는 사실을 수학적 귀밥법으로 증명하는 법이다. 이를 구현하려면 우선
첫번째 경우에 전술한 희망사항이 성립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며, 그 다음에는 증명 결과가 모든
경우에 도미노처럼 파급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와일즈는 첫번째 경우에 대한 증명을 연구하던 중
이것이 16세기 프랑스에서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한 무명의 천재에 의해 이미 증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페이지 269
에바리스트 갈루아: 1811년 10월 25일 파리 남쪽 부르 라 레느에서 탄생. 그의 아버지 니콜라 가브리엘 갈루아는
에바리스트 갈루아가 네살때 시장으로 선출. 에바리스트 갈루아는 열두살때 리쎄라는 학교에 입학.
16세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수학 수업을 받고 이후 다른 과목은 제쳐놓고 오직 수학공부에만 몰두하였고
곧 수학 선생조차 가르칠 수 없게 되어 홀로 당대 최고의 대가들이 집필한 수학책을 공부하였고 17세에
첫번째 수학 논문을 작성하여 학술지에 발표. 허나 그의 답안지는 내용이 너무 복잡하고 파격적이라 체점하는
선생들도 이해하지 못하였고 갈루아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낼 뿐 그것을 종이 위에 자세히 옮겨 적는 일을 싫어했고
주변사람들에게 무관심한 반응을 보여 빈축을 샀고 명문인 에콜 폴리트니크에 응시했을 때에도 퉁명스럽고 귀찮다는
듯한 말투로 답해 면접시험에 낙방하였고...부친의 자살 이후 그는 극렬 공화주의자가 되어
과격한 시위를 하다 감옥에 한 달 동안 수감되는 등...그러다 스테파니라는 여자의 약혼자가 질투하여 결투를 청해
결투 하루 전 갈루아는 자신의 마지막을 감지하고 5차 방정식의 일반해를 구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노트하여 남겼다.
이 결투에서 갈루아는 사망하고 ...갈루아의 형과 친구가 갈루아가 생전 남겼던 논문을 정리하여 배포하였으나 갈루아의 업적을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사망한 날은 1832년 3월 30일, 21 살.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수 있었더라면 ...
와일즈는 증명을 해보였지만, 페르마가 증명했다는 방법과는 달랐을거 같다. (현대 수학으로 17세기 수학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 많은 사람들은 페르마는 증명을
하지 못했었고 그건 아마도 자신이 증명했다고 착각했을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난 페르마는 자신의 방식대로
증명을 했을것이라 보는 사람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느낌에 (그냥 나의 감 ^ ^) 와일즈의 증명 방법보다 조금 덜 복잡한,
단순하면서도 명료하고 아름다운
증명방법이 존재한다고 본다.
리뷰가 너무 길어졌는데, 사이먼 싱의 다른 책들도 읽어 볼 생각으로 영어로 된 것을 찾아 주문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는데 미국에서 파는 이 책의 타이틀은 Fermat's Last Theorem 이 아니라,
<Fermat's Enigma: The Epic Quest to Solve the World's Greatest Mathematical Problem>
입니다.